Ping 19/02/2023 .01 : 어른이 되기
(최근 며칠 우울하고 내가 어른이기는 한가 싶은 자괴감에 빠졌었다. 그래서인지 자기합리화를 위해 이런 글을 쓰고 있는거 같기도 하다.)
나의 옛날 이야기
80년대의 기억에는, 참 자주도 불량식품 단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던 것 같아. 그리고 실제로도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장난감 등등의 라이센스나 품질관리에 대한 관념이 희박했던거 같아.
지금은 이것저것 검정이나 인증마크를 더 붙이기 바쁘게 되어서 너무 과도하지 않은가 싶을 정도니까,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낫지 않을까.
물론 80, 90년대는 일본문화개방도 되지 않았었고 엄밀하게 말하자면 불법은 아니었을테고, 더 나아가서 어린 국민들을 염려한 윗분들의 지시로 수많은, 한국산 고전애니메이션이 본의 아니게 붐을 일으켰었다는거 같다.
그때에 윗분들은 사단장이나 그 이상의 분들이셨을테고, 군대에서 지시를 내리듯이, 병사들을 관리하듯이 그렇게 국민들 생각하시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문득 문득 관련자들이 어떤 이익을 얻었을까 상상도 해본다. 물론 그분들이 좋은 사람이었다 나쁜 사람이었다 내가 판단하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 글에서는.
어른의 사정
문득 사회생활을 한지가 오래 된거 같은데, 나름대로 많은 '어른'들을 보아 온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어른들 틈에서 그다지 다르지도 않은 공통점이 조금 지겹다.
그 공통점은, 당연한 이익을 위해서, 또는 당연한 손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논리에 묶여서 판단하고 행동할 수 밖엔 없다는 점이다.
흔하게 말하는 '어른의 사정'1
그런데 어떤 어린이는 어른을 이해한다. 때로는
그때에 내가 사고 갖고 놀고, 실망케 하던 장난감들이 떠올랐다. 설명서를 따라서 조립을 하려고 해도 부품이 불량이거나 품질이 너무 떨어져서 마음대로 갖고 놀지도 못해서 어린 마음에 화가 나기도 하고 뭐가 문제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었던거 같다. 지금에 돌아서 보면, 어째서 그랬었고 뭐가 어떻게 문제였었던가 어느 정도 알것도 같은 그런 기분이 들지만.
아마도, 당시의 한국의 경제상황, 사회구조상 생존을 위해서는, 아마 그게 경제적인 최선이었겠지 추측한다. 공산품의 품질을 올리기도 급급했을테고, 그런 장난감만이 아니라, 아마도 세상에 계속 있어 왔을 식빵 같은 상품의 브랜드도 (내가 기억하는 것만해도) 시대를 거듭하며 취향이 변해왔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런 사정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나 또한 생존하기 위해서, 그리고 또 성장해서 다음에 더 나은 기회를 얻으려면 당장에는 초라해질 수 밖엔 없었을 것을 너무나 진심으로 공감하고 그 마음이 정말로 오늘을 살고 있는 나는 정말로 고맙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정말로 그렇게 생존을 했기 때문에 꽃을 피워 냈을지도 모르니까.
The Overfitting
과거에 대한 생각에서, 현재로 다시 돌아와보자. 나는 아담스미스가 말했다고 전설 같이 전해지는 '이기적인 역할자들만 있다 해도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결국 사회전체는 이익을 얻는다'고 누군가 자기합리화를 위해 말하거나 하면 뭔가 기분이 묘하다.2 그래서 스스로도 냉혹하고 자기 이익만을 위해야 한다고 믿고 또 그렇게만 행동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치열한 사회의 어른으로서 행동하지도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그런 생각을 자주하고 살았었다. 그 생각이란,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가 엉망이 되거나 품질이 떨어지거나, 그냥 어떻게든 더 사용자의 주머니에서 돈을 더 가져가는 것에만 고민하고 있는게 느껴질 때에 드는 바로 그 생각 말이다.
사용자나 소비자로서만이 아니라, 그런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기업에서 일을 해본 경험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생각을 공감하기 쉬울거 같다:
- 무한경쟁이나 이윤의 추구의 과정에서 사용자나 세상을 좋게 만드는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는 말은 허구적이다.
- 오히려, (당연하게도) 이윤추구이나 경쟁 그자체에 더 적합하게 적응할 뿐이다.
- 그 과정에서 말하는 사용자를 위해서라느니, 세상을 위해서라는 말들은 실제로는 목적점이 아닌, 그저 그런 과정의 일부로서, 경쟁도구의 일부로서, 대칭적으로 갖춰야만 하는 전력이라고 생각해서 갖다 붙여진 말일 뿐이란 것.
물론 다들 그렇게 말할거 같아. 그래야 누군가는 상대가 순박하게 어리석은 사람들이길 바라면서 더 생산적이길 기대하며 저런 것들으로 환상을 심어주고 올바른 궤도에 있다고 믿게 만들고 싶을 때에도 허울삼기 좋을거 같다. 3
아마도 애시당초 기업이란 이윤추구와 경쟁이 없이 어떻게 생존하겠느냐고 반문하겠지만, 그걸 부정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캐치프레이즈나 슬로건의 공허함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그런 캐치프레이즈나 광고문구, 슬로건을 내걸려면, 적어도 일말은 그런 것을 구현하는 것을 더 비중을 두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직은 어린 마음인, 그래야만 한다는 강박
소시오패스나 싸이코패스를 두려워 하는건지, 아니면 숭배하는 것인지 잘 가늠하게 어려운 뉴스, TV프로그램을 종종 접한다. 내 생각에는, 불편하고 경계는 해야겠지만 두려워 하거나 숭배해서는 안되는거 같은데 말이다.
잔혹하고 끔찍한 뉴스를 접하면서, 싸이코패스이니 소시오패스이니 말하면서 무리를 지으며 여론을 만들고, 스스로는 정상인, 혹은 선하다고 인증을 받아서 무리에서 거절 당하지 않는 위치에 속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렇게 무리를 짓고, 돌팔매질을 하고 손가락질을 함으로써 무리 안에서의 소속을 확인하는게 본능일테니까.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는 또 픽션에서는 소시오패스나 싸이코패스들을 그리며, 냉혹하게 이익만을 추구하며 인간성이 없는 이들을 그리며 또 그들의 냉정하고 침착함, 그리고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생각할 때엔, 그렇게 사회적으로도 성공적이지 못할거 같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렇게 행복하지 못할것 같다. 그래서 숭배할 이유도 없지 않나 싶다.
그리고 혹여 남들이 내게 그런 프레임을 씌우려고 한다고 해도 유치하다고 느껴진다. 위에 말한대로 그 무리짓기 본능에 호소하고 싶을 뿐인, 그렇게 프레이밍하는 사람 스스로가 아마도 훨씬 더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깝다고 스스로 공표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니까.
어째서인지, 아담스미스에 대한 오해/곡해와 마찬가지로, 공공연하게 '경제적 인간'이란 그런 소시오패스/싸이코패스일거라 생각하며 모두 행동하는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인간적인 공감이나 연민 없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정말 경제적인 이익을 가져오지 못할거 같은데 말이다.
이 세상은 아귀지옥과 같은 것이 사실인거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꼭 짐승이나 아귀로서 생각하고 행동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어리고 약한 마음이라면, 세상 모두가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그렇게 할 수 밖엔 없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러나 그보다는 더 성숙한 마음이라면, "그럼에도 나는."이라고, 그런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의 주인으로서 말할거 같다.
짝사랑, 혹은 도착증과 그 반대로써인 쩌리의 자존심
난 돈이 많았으면 좋겠고, 사회적으로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나 홀로 세상에 대해 짝사랑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내게 마음을 줄 생각이 별로 없는거 같다.
종종 그런 슬픈 짝사랑에 빠진 것 이상으로 도착증 수준으로 성공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싶다.
현실은 초라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 초라한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이것저것 사고 활동하면서, 그런 껍질이라도 뒤집어 쓰려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비록 세상의 눈부신 성공이나 결과를 이루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래도 그런 '쩌리'이지만, 그 나름의 자존심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가끔 갖고 있었는지 까먹고는 하기도 하는거 같다. 그리고 종종은 당신도 그럴거라면 그런 쩌리의 자존심을 갖거나 찾아내 들춰 보는 것은 어떨지 권하고 싶기도 할 때가 있다.
신화적인 닌텐도와 그 빠
요즘엔 예전보다 더 닌텐도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예전의 NES, SFC, GameBoy 시대의 슈퍼마리오, 별의 커비, 젤다 등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내가 가장 놀라는 점은, 게임 타이틀에 표시되는 연도와 그 게임의 정교함, 섬세함의 강렬한 대비.
대부분은 80년대 말, 90년대 중후반에 발매된 게임들을 플레이하고는 하는데, 그때 당시에 저런 정도의 용량으로 이렇게 섬세하게 플레이 가능하고, 이런저런 게임내 세계에 저런 장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아직도 종종 놀란다.
누군가는 당연하게 받아 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냥 조금이나마 프로그래밍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나 스스로는 어떻게 했을지 상상과 추측을 해본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 도달하는 결론은, 이걸 만든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 자신의 일을 즐겁게 여겼을지 느껴진다. 그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서적도 많이 있겠지만 그걸 찾아보지 않아도, 단지 그들이 내놓은 결과물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그걸 느끼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엄청나게 부끄러워지고는 한다.
그때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많은 메모리와 컴퓨팅파워가 갖추어진 현재에 내가 저렇게 애착을 갖고 즐겁게 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부끄러워진다. 그때에는 프로그래밍을 위한 지식을 접할 채널도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제한적이었을텐데 말이다. 4
…그리고 글쎄다, 단순하게 돈을 벌기만을 위해서였다고, 그래서 싸구려 저질의 제품을 만들고 그걸 적당히 팔아서 이익을 내는데에만 치중했다면, 오히려 저렇게 닌텐도가 성공하고 오래토록 그 성공을 영위하고 있을지 잘 모르겠다.
다른 말로 한다면, 흔히 말해지는, 그 어른의 사정에 따라서, 적당히 해서, 회사는 이윤추구가 목적이므로, 그렇게 한다고 실제로는 아무도 즐길 수 없고, 아무도 사용할 수 없을 제품이나 서비스를 허울만 만들어서 해나갔다면, 닌텐도는 닌텐도가 되지 못했을 것 같다.
닌텐도는 어쩌면 그런 어른이랍시고 빠져야만 할 것 같은 진지함, 그래서 너무나도 진지해서 단기수익이니 수익위주경영이니 같은 '글자만 어른'이 되려는 놀이는 포기했기 때문에, 그리고 아마도 그러면서도 자존심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진짜 어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진짜 어른'은 그걸 갖고 논 사용자들의 동심을 실망시키거나 아프게 하지 않았을테고, 또 어른으로서 당당하게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가 되었을거다. 너무나 아이러니하게도 '글자만 어른'이라고 어른놀이를 하는 이들과는 달랐기 때문에 진짜로 어른이었던거겠지 싶다. 5
"괜찮아"
글쎄다. 당장에 현실이라고 말하면서 실은 합리화나 자기입지, 주도권만을 위한 도구로써 갖다 붙이면서 어른놀이를 하면서, 실제로는 어른스럽지 못한 것보다는, 그런 놀이는 내려놓고, 스스로 어른이랍시고 하는 이들의 손가락질을 그렇게 신경쓰지도 않으면서 정말 어른이 되는 편이 더 낫겠구나 싶다.
아마 이렇게 신화나 환상적인 이야기이나 하니까, 나는 이렇게 쩌리이겠지만. ㅎㅎ
Footnotes
나무위키 '어른의 사정' 에서: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하다 보면 알게 되는 사회의 더러운 면이나 치사하지만 어쩔 수 없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말하기 힘든 사정을 의미한다."
실은 아담스미스를 오해했거나 곡해한 것이리라 생각한다. 저 단편만을 가져다가 인용하며, 스스로가 얼마나 냉철하고 지적으로 느끼고 싶은 기분도 충족시키고, 하지만 확실하게는 문제가 있는 생각들을 합리화해내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럴거 같다. 동아비즈니스리뷰: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대부분의 '테크기업'들이 왜 매 계절마다, '트렌디'하다는 테크스텍으로, 실은 별로 이득도 없거나, 생산성도, 유지보수성도 나쁠 일을 할까 싶을 때가 많다. 물론 경영진이 테크리터러시가 낮아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게 대부분이겠지만, 투자자나 고객을 위한 전시용이기도 할거 같고, 또 스스로의 '개발커리어'를 위해서 그런 테크스텍을 쓰고 싶어하는 개발자들을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테크스텍이 커리어에 유의미할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그들 스스로가 하드웨어부터 만들었고, 또 오히려 지금처럼 distraction이 많지 않았을테니 더 생산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그 결과물이 시대를 뛰어 넘는다는 점과 그걸 만든 이들의 깊은 애정이 느껴지는 것은 여전하다.
난 별로 진짜 어른도 못되고, 글자만 어른이었던거 같아서 후회를 종종한다.